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.
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.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. (인연 중)
하루키를 읽자하면 늘 피천득 님의 이 <인연>이 생각난다. 하루키의 단편집은 대체로 편하게 읽힌다. 푹신한 소파에 몸을 길게 누이고 천천히 책장을 넘긴다. 하루키는 그의 단편에서 소설에 있어야 한다는 기승전결을 꽤 과감하게 생략한다. 할머니가 들려주는 옛날얘기처럼, 천천히 들려주는 하루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다 보면 늘 잊고 지내던 누군가가 생각이 난다. 그의 이야기가 흡입력을 가지는 이유도 결국 그는 그의 목소리를 빌어 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.
하루키를 읽고 있으면 이미 잊어버린 줄 알았던 그 사람과 그때의 상황, 그 감정이 떠오르곤 한다. 그렇게 미묘하게 이밤 나는 감성적이게 된다. 만약 그때 내가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지금의 우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?
책의 8편의 이야기가 다 재미있었는데 개인적으로 <시나가와 원숭이의 고백>을 즐겁게 읽었다. 우연히 묵게 된 일본 료칸에서 나는 종업원으로 일하는 원숭이를 만나 그가 연모하는 인간 여자들의 이름을 훔치곤 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. 꿈같은 이야기를 잊고 그렇게 하루하루 살던 어느 날 나는 자신의 이름을 깜빡거리며 기억하지 못하는 여자를 발견하곤 그때 그 원숭이를 떠올린다. 누구에게나 있는 이 건망증을 하루키는 이렇게 설명한다.
책에 나오는 8편의 이야기는 늘 그렇듯 서로 관계하지 않는다. 요즘 세계관이 유행이라는데 하루키는 그런 것 따위 아마 있는 줄도 모를 것 같다. 한 편을 읽고 맥주 한잔, 또 한 편을 읽고 비틀스의 음악을 듣거나 슈만의 <사육제>를 듣는 것도 좋을 것 같다. 하루키월드는 늘 즐겁다. 적어도 내겐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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